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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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8

 

몇 달 전에 in 님께서 추천해주신 영화인데 이제서야 보게 됐네요. in 님이 이 글을 보고 계실진 모르겠지만, 덕분에 좋은 영화를 만났다는 거, 그리고 재밌게 잘 봤다고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어제는 개인적으로 자괴감에 빠져 우울과 우울의 경계선에서 안 좋은 생각만 잔뜩 하던 하루였습니다만, 영화 한 편 보고 나니 많이 개운해졌더라구요. 이 영화는 2차대전, 나치와 유태인을 다룬 영화지만 무거운 소재에도 불구하고 통통 튀는 배경음악과 위트있는 전개로 오히려 가슴이 따뜻해지는 영화였습니다.

 

세 사람의 기묘한 동행

우크라이나 출신 유태인인 할아버지가 2차 대전 중 미국으로 망명, 이 망명을 도와준 인물을 찾아온 그의 손자 조나단은 우크라이나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미국인도 싫어하고 유태인은 더더욱 끔찍히 싫어하면서 유태인을 태우고 가족을 찾아주는 여행사 일을 하는 이름이 알렉스인 두 사람과 만나게 되죠. 두 사람 역시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로 할아버지 알렉스는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장님인 척(!!)을 하고 자신의 개를 끔찍히 여기는 사람이고, 손자인 알렉스는 미국문화를 동경하고 마이클 잭슨과 샤킬 오닐을 좋아하고 온 몸을 아디다스로 칭칭 휘감았지만 정작 미국인에 대해서는 시니컬하고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죠. 사실 조나단 또한 평범한 인물은 아닙니다. 2:8로 단정히 빗어내린 머리에 검은색 넥타이와 검은색 정장으로 무장하고 검은색 뿔테안경까지 쓴 그는 언뜻 보기에 보수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또한 그에게는 특이한 취미가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수집벽.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기억할만한 어떠한 사소한 물건(물건이라 함은 '동물'도 포함되는..=_=;)이라도 당장에 플라스틱 봉지를 꺼내 수집하는 수집벽이 있습니다, 그리고 채식주의에 개라면 질색. 그렇게 세 사람은 조나단의 할아버지의 고향인 트라침브로드를 찾아 여행을 떠납니다.

 

문화적 이질감과 낯선 나라 우크라이나

여행 중간중간 우크라이나인인 알렉스와 미국인인 조나단 사이에 문화적 갭이 발생합니다. 미국문화를 동경하고 언젠가 미국에 가고 싶어하는 알렉스는 조나단에게 흑인(니그로...-_-;;)과 동성애자(호모섹슈얼) 관련 질문으로 거침없이 들이댑니다. 조나단은 알렉스에게 '니그로'란 단어를 쓰지 말라 해보지만 알렉스는 조나단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잠시 들른 민박집에서 채식주의자인 조나단은 고기를 안 먹는다고 고기 없는 음식을 달라고 하는데 이를 듣는 우크라이나인들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조나단의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한 길을 알려준 우크라이나인에게 돈 대신 말보로 담배를 내미는 조나단을 보며 손자 알렉스와 할아버지 알렉스, 길을 알려준 우크라이나인도 '팁'이란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조나단은 '발렛파킹'할 때도 '팁'을 건넨다고 하자, 손자 알렉스는 '왜 주차를 남이 대신해주냐'며 '발렛파킹'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돈이 아닌 말보로 담배를 내미는 조나단을 보며 비웃었죠. 또 한 가지 중간중간 영화의 백미는 유태인과 미국인을 무시하는 할아버지 알렉스의 말을 중간에서 손자 알렉스가 통역해주는 장면들입니다. 손자 알렉스는 조나단이 알아듣기 쉽도록(?) 적당히(??) 왜곡해서 통역해 줍니다;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우크라이나'라는 나라는 사실 우리에게는 굉장히 낯선 나라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우크라이나'와 '우즈베키스탄'을 헷갈려 하기도 했죠-_-;;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에 붙어있는 나라고 '우크라이나'는 동유럽에 있는 나라로, 러시아 혁명 때 스탈린에 의해 강제 합병당하고 이후 2차 대전 때 진격해 오는 독일군을, 영화에서도 언급됩니다만, '해방군'으로 맞아들이지만 독일군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죠.

우리에게 있어 '유럽'이라는 대륙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중세시대, 근대 제국주의 시대까지 '미국'이라는 나라가 본격적으로 열강에 들기 전 '세계사'라는 과목의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는 문명의 대륙으로 인지되는 그런 대륙입니다. 유럽의 어느 나라라면 역사와 전통, 문화가 꽃피우는 뭐든지 멋있는 곳일거라 생각하지만 영화 속 '우크라이나'의 모습은 도심임에도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고, 맥도날드의 간판도 허름하며, 심지어는 차를 한 번도 타보지 않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우리가 생각해왔던 '유럽'의 기본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음을 보여주죠. 이는 2차대전의 상흔과 냉전의 시기, 유럽의 변방이라는 지역적 조건이 '동유럽'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의 참상

영화 중반을 넘어서면 세 사람이 지나는 길목에서 전쟁 무기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곳이 등장합니다. 그런 무기를 촉촉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할아버지 알렉스를 보며 저는 할아버지 알렉스가 2차 대전에 참전했던 군인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온통 해바라기가 가득한 트라침브로드라고 생각되는 곳에 도착하고 수집벽이 있는 조나단처럼 강에서 주은 물건들을 잔뜩 모아놓고 사는 어느 여인을 만난 할아버지 알렉스의 모습은 그 전까지 유태인을 지독히도 싫어하던 괴팍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고통스러웠고 아주 슬퍼보이는 얼굴이었죠. 그리고 드러난 과거에서 그는, 오래 전 전쟁 때 독일군에게 잡혀 총살당했지만 기적처럼 우연히 총에 맞지 않아 살아나게 된 트라침브로드의 유태인 중 한 명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총살터에서 죽은 자들의 물건을 수집하다가 그가 살아나는 걸 지켜본 여인은 이후 해바라기밭을 지키고 있던, 조나단이 찾던 할아버지의 망명을 도운 어거스틴의 언니인 사람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알렉스는 그 이후 지난 세월 자신이 유태인임을 철저히 배격하며 오히려 유태인을 미워하며 살아왔던 거죠. '전쟁'의 잔인함은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던 것입니다.

트라침브로드는 그렇게 2차대전 때 독일군의 침략으로 1,000여명의 유태인이 몰살당하고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으며 남아있는 건 그들의 희생을 기리는 자그마한 비석 하나뿐입니다. 해바라기가 둘러쌓인 작은 오두막에서 죽은 자들의 물건을 주워담던 여인은 그 물건을 찾아올 사람을 기다리며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조나단은 여인이 건네주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미국 망명시 그를 도와주웠고, 또 사랑했던, 할아버지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던 어거스틴의 유물을 받으며 우크라이나에서의 여행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쓰다보니 엄청 길어졌네요.. 영화 감상 쓰면서 이렇게 길게 쓴 적은 처음인 듯.. 그런데 글솜씨가 부족해서 뭐 많이 쓴 것 같기는 한데 내용은 좀 부실한 듯 싶습니다. 아 부끄러워라. 아무튼. 사소한 기억이라도 주워담아 수집해 놓는 조나단과, 전쟁의 기억을 수집해뒀던 해바라기밭의 여인, 전쟁의 기억을 시간 속에 묻어두고 외면해왔던 할아버지 알렉스. 영화는 '수집'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과거 전쟁의 기억을 잊지 말자고 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아..... 뭔가 더 멋진 말을 쓰고 싶었는데 한계가..-_-;

마지막에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또 다시 들른 민박집에서 할아버지 알렉스는 욕실 욕조에서 손목이 그어진 채 발견됩니다. 손자 알렉스도 자신의 할아버지가 왜 자살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보고 있던 저도 왜 할아버지 알렉스가 자살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필시 전쟁을 대하는 유태인만의 다른 감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행위 때문에 어떤 커뮤니티의 모 분들이 과거 홀로코스트의 이력에 대해 히틀러가 왜 유태인을 죽이려 했는지 알겠다면서 오히려 히틀러의 잔인한 학살을 동조하는 댓글을 다는 걸 종종 보곤 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대하는 것은 정말로 나쁜 짓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한 게 잘한 짓이라는 명분을 주지는 못하죠. 2차 대전의 홀로코스트와 최근의 팔레스타인은 나눠 놓고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